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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성냥팔이 소녀를 잊은 그대에게 <최충언>

출처: yes24

::작가 소개::

외과 전문의. 81년도에 고신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이듬해인 82년 3월 18일에 '부산 미군 문화원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징역을 선고받는다. 수감 중 세례를 받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다. 무료 자선병원인 구호병원에서 8년간 일하면서 가톨릭센터의 무료 진료소 '도로시의 집' 설립에도 참여하는 등 이주 노동자 진료를 도왔다.

이 책 이외에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 - 달동네 외과의사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인생기출문제집 2 - 대한민국 이십 대는 답하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 감상 ::

노숙자 복지 대책 중에 '주거 우선' 전략이라는게 있다. 샘 쳄베리스가 제안한 이 전략은 안정적 주거가 확보된 뒤에야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대처를 시작한다는 이론에서 출발한다. 
캐나다의 인구 6만3000명의 작은 도시인 메디신 햇에서 노숙자 해결책으로 주거를 제공했다. 주거만 제공하는 비용이 노숙자들에게 긴급 의료 등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용보다 저렴했고, 근본적인 효과가 있었다. (17% e-book)

 

이 책을 통해서 평소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노숙자 복지 정책이라던지, 이주 노동자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생계가 어려운 사람에게 다른 무엇보다 잠잘 곳을 마련해주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주거만 제공해도 다른 서비스 복지정책 비용보다 저렴하다고 하니 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복지 정책을 통해 노숙자들을 사회로 나올 수 있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난을 게으름의 산물로 여기는 세상의 잣대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22% e-book)

 

노숙인의 자존심. 정말 생각도 해보지 못한 주제이다.

그들의 마음을 보살피고 삶의 현장에서 직접 인술을 펼치는 최충언님이 다시 한번 대단하다고 느꼈다. 

물질로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숙자들이 다시 일어나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산산이 부서진 멘털과 자존심을 복구시켜야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노숙인들에게 인문학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공정하다는 착각」 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우리 사회는 철저한 능력주의에 따라 가난을 한 사람의 잘못으로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다. 가난을 게으르고 덜 떨어져서 얻게 된 당연한 결과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노숙자를 보는 시선 역시 곱지가 못하다. 본인이 잘못해서 집도 잃고 가족도 잃었는데 왜 우리가 도와줘야 하냐고. 비난과 질타의 시선을 보낸다. 그럼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가진 게 많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달동네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그렇다. 그땐 깨어진 접시에 담긴 김치를 담 너머로 나누던 살가움이 있었다. '자발적 가난'이니 '인간의 존엄성'이니 하는 거창한 말이 필요치 않다.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나눌 수 있을 때 그냥 나누면 되는 것이다.     67% e-book

 

가진 게 많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는 문장이 내 마음을 울렸다.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있으면 물질이든 시간이든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내 주위부터 돌아보자. 앞만 보지 말고 주위도 살펴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라는 것이다. 이것은 엄밀히 따지면 만남이 아니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서로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무서운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준다는 것은 어쩌면 바보짓일지도 모른다. 83% e-book

 

사회에서 낙오된 노숙자. 어울리고 싶어도 차별받는 이주 노동자. 소외된 도시 빈민들. 

한동한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 책만 읽다가 이들이 주인공인 책을 읽으니 기분이 묘했다.

절대 뒤쳐지고 싶지 않았을 그들에게 왜 노력하지 않았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 덕분에 그들과 아무 관계없던 내가 아주 조금의 관계성이 생긴 것 같았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