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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너는 모른다<정이현>

너는 모른다 정이현 출처:교보문고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책들(주로 자기 계발서)을 골라 읽었다. 문학, 특히 소설은 수능 때 이후로는 간간히 시간 죽이기용으로 읽었다. 하지만 한 가지 장르만 읽다 보면 지겹기 마련인지라 나는 소설책도 읽기 시작했다. 소설을 읽는 데 가장 큰 재미는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내 옆에 있을 법한 친숙한 캐릭터부터 평생 만나볼 수 없을 것 같은 판타지 속 외계인까지. 문학 작품에서는 시, 공간이 제한적이지 않고 도덕적 잣대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사회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깊숙히 들여다볼 수 있다. 때로는 그들이 어쩌다 범죄를 저지르게 됐는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앞, 뒤 경황을 들을 수 있고 감정까지 파악할 수 있다. 문학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윤리 기준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소설 속 인물을 가여워하거나 공감하는 등 타인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정이현 작가는 「너는 모른다」에 등장하는 가족 구성원 한명을 전면에 등장시켜 그의 시각에서만 사건을 바라보지 않는다. '막내딸의 유괴 사건'이라는 한 가지 사건에 대해 가족들이 대응하는 방식이나 생각들이 제 각각이다. 그래서 독자로써 더욱 흥미롭고 범인을 유추하는 재미가 있었다. 나는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보통 범죄 스릴러들은 새드 엔딩이거나 범인을 찾지 못하는 찝찝함이 남아서 보고 나면 마음이 무겁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소설은 '해피 엔딩'이다. 그래서 마음이 한편 놓였다. 다만 마지막에 왜 막내딸이 사고를 당해서 촌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발견됐는지 정확한 상황 묘사가 없고 어영부영 넘어간 느낌이다.

 

 어쩌면 작가는 '막내 딸의 유괴 사건' 자체를 통해 이 가족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호적상으로는 가족이지만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전혀 애정이 없는 사이였다. 세 자녀의 관계를 보면 남매는 유괴당한 막내딸의 이복형제들이고 막내딸은 엄마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 남자 친구의 아이이다. 아이의 엄마는 화교로 불안정한 삶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지금의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결혼했다. 막내딸 유지는 위태로운 가정환경 속에서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친구 한 명 없이 외롭게 지내다가 우연한 기회에 가출하게 된다. 가족들은 유지를 찾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면서 결속력이 생기게 된다. 커다란 애정은 아닐지라도 유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뭉치고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 문제,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장기 매매에 대한 것들이다. 인물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일까? 다행스럽게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이 거의 없다. 아마 사건 위주의 소설이었다면 나는 소설을 끝까지 읽기 힘들었을 것이다. 유지의 미래가 산산히 부서져 버린 것은 안타까웠지만 가족의 품에 돌아온 장면에서는 눈물이 났다.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났는지 유지가 불쌍해서 눈물이 났는지는 정확하게 분별하기 어려웠다. 여러 가지 감정이 한데 엉켜서 한참 울었던 것 같다.

 

 **이것은 소설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나는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손에 잡힐 듯이 혹은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표현하는 문장에 감탄을 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말들을 작은 어금니로 오독오독 깨물었다. p 345(e-book)
옥영은 제 삶이 영원히 길고 희미하게 뻗은 일직선 위에 놓여 있으리라 믿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일치하는 한 권의 책처럼. p488
제 머리 위에 이고 있는 것이 드높은 하늘이 아니라 종유동굴의 낮은 천장인 것처럼 노파는 등허리를 구부리며 걸었다. p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