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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92)<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출처:교보문고

 

지은이:: 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생.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재학 중  한국전쟁을 겪고 학업을 중단했다. 마흔 살이 되던 1970년 장편소설 「나목」이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2011년 1월, 담낭암으로 타계하기까지 쉼 없이 작품 활동을 하며 40여 년간 80여 편의 단편과 15편의 장편소설을 포함, 동화, 산문집, 콩트집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작가의 자전 소설로 194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줄거리::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주인공인 '나'와 오빠, 엄마가 주인공인 가족 소설이다. 소설 초반부는 주로 박적골의 아름다움과 할아버지와의 추억에 대한 유년 시절 이야기이다. 행복했던 유년기 이후 엄마의 높은 교육열 덕분에 오빠와 함께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다. 서울 현저동은 박적골과 다르게 지저분하고 풍경이 삭막하다. 나는 동무 없이 혼자 산을 넘어 학교에 등교한다. 산에는 아카시아 나무만 가득하고 고향에서 지천에 널려 있던 싱아( 줄기의 질긴 껍질을 벗기면 부드러운 속살이 나오며 이를 생식한다. 맛은 새콤하고 시원하다.)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서울에서 학교 생활을 하면서 친구를 제대로 사귀지 못하고, 방학 때 고향에 가도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겉돈다.

 오빠가 학교를 졸업하고 철공소에 취직하면서 집안 형편은 나아진다. 나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오빠를 멋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오빠를 따라서 잠시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책도 접하게 된다. 곧 오빠는 사상에 대한 관심을 접고 교사가 되고 이후 결혼을 한다. 해방했다는 소식이 들려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나와 가족들에게 고난이 닥친다. 의용군으로 전쟁에 끌려갔던 오빠가 집에 돌아오자 가족들은 '빨갱이'로 의심받고 가족 대표로 '나'는 어려움을 겪는다. 다행히 가족들은 무사히 시민증을 받고 피난길에 오르려 하는데 오빠가 사고로 다리에 총을 맞아 피난을 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결국 주인공과 가족들은 현저동에 남아 숨어 지내기로 결심하고 소설은 끝이 난다.

 

감상:::

 

아카시아꽃도 처음 보는 꽃이려니와 서울 아이들도 자연에서 곧장 먹을 걸 취한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 꽃을 통해서였다. 잘 먹는 아이는 송이째 들고 포도송이에서 포도를 따 먹듯이 차례차례 맛있게 먹어 들어갔다. 나도 누가 볼세라 몰래 그 꽃을 한송이 먹어 보았더니 비릿하고 들척지근했다. 그리고는 헛구역질이 났다. 무언가로 입가심을 해야 들뜬 비위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 전자책 브랜드웅진지식하우스)

*주인공인 '나'는 풍요로웠던 시골 생활을 뒤로하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 억지로 서울로 상경했다. 8살 어린아이에게 서울 생활은 낯설고 주변 모든 것이 싫었으리라. 게다가 고향에 없던 아카시아 나무는 일제 강점기를 은유하고 있는 듯하다. 고향에서도 식민지에 처한 사실을 문득 깨닫곤 했지만 '나'는 서울 생활을 하면서 학교에서 하는 신사 참배나 일본어로만 하는 수업, 일본어를 못하는 어머니를 경멸하는 일본인 선생 등 일제의 억압을 고스란히 느꼈다. 우리나라에는 없던 아카시아꽃을 억지로 먹어보지만 헛구역질이 나고 고향에 있던 싱아를 먹고 싶다는 아이를 보며 우리나라의 아픈 현실 속에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곂쳐 보였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겠다는 오빠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오빠를 딴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대해 묘한 긍지를 느꼈다. 나야말로 무엇을 알아서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속물의 세계에서 별안간 우뚝 솟은 어떤 정신의 높이를 본 것 같은 환각이었다. 
...
(의용군으로 잡혀갔다 돌아온 오빠를 보며)
오빠는 심한 피해망상을 앓고 있었다.
"어쩌면 나 시민증 하나 그냥 좀 내다 줄 백도 없냐 우린."
이런 소리까지 부끄러움 없이 했다. 어쩜 우리 오빠가 저렇게까지 비굴해질 수 있을까. 피해망상의 결과겠지만 비굴은 피해망상보다 더 꼴 보기 싫었다. 안 보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묶인 한 운명의 줄을 끊을 가망은 없었다. (브랜드 웅진 지식하우스)

* 위의 인용글을 읽으면 '나'는 오빠를 다른 가족들과 다르게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할아버지가 창 씨 개명을 반대하는 행동이나 어머니가 일본인 선생님 앞에서 우리말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행동을 민족의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의 행동은 그들과 다르다고 느꼈다. 아마 평소 말 없는 오빠가 처음으로 한 주장이었고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도 꿋꿋하게 의견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원래 오빠는 양반 의식이나 이득을 바라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란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 말미에 '나'의 자긍심이었던 오빠는 사라지고 없었다. 의용군에 잡혀갔다 온 오빠는 사지는 멀쩡했지만 피해망상을 앓고 있었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요행을 바라는 모습이었다. 나'는 가족 중에 유일하게 역사의식이 있고 당당했던 오빠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수치스럽고 부끄럽다고 느꼈다. '나'는 그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끝까지 함께 가야 할 공동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아무도 넘을 엄두를 못 낼 것처럼 높고도 무섭게 생긴 철문 이건만 양쪽에 칼 찬 순사가 지키고 서 있었다. 내가 순사를 보고 주춤할 때마다 내 동무는 안 잡아갈 테니 겁내지 말라고 했지만, 미끄러져 내려올 때마다 순사가 덜미를 잡는 것처럼 등골이 오싹오싹했는데 그 맛이 미끄럼 타는 재미를 더했다.
 미끄럼 재미에 팔려 풍차바지 대신 엄마가 사준 신식 내복 궁둥이가 해지는 줄도 몰랐다는 건 매 맞을 짓이라는 각오가 돼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메리야스 해트린 것보다 감옥소 마당에서 논 걸 더 큰일로 여기는 듯했다. 노발대발하고 나서 감옥소 앞 동네에 사는 처지를 장탄식하는 눈물까지 비치는 게 아닌가.

*자전 소설이기 때문에 글쓴이의 이름도 소설에 등장하고 '현저동'이나 '사직동' 등 서울의 지명이 그대로 나온다. 그래서 글을 읽으면서 그 당시 서울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요소 중 하나였다. 위의 인용문에 적힌 곳은 위치상 서대문 형무소였을 것이다. 현재는 독립운동을 참여했던 많은 시민들이 투옥됐던 역사적인 장소로 민족의 뼈아픈 과거를 보여주는 곳이다. 하지만 당시 아이들에게는 그저 두려움과 공포의 장소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발에 쇠사슬을 차고 기분 나쁜 빛깔의 옷을 입고 형무소에 들어가는 사람들과 옆에 칼을 찬 순사들의 모습은 아이들이 잘못을 하지 않았어도 괜히 몸이 움츠러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놀 곳이 없어 감옥소 앞마당에서 미끄럼을 타야 하는 그 시대의 아이러니를 깨닫게 되는 대목이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브랜드 웅진 지식하우스)

* 194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나라는 일제에서 해방했으나 이념이 다른 북과 남으로 나뉘어 6.25 전쟁이 발발한다.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피난을 가야 하는 선택을 강요받았다. 사람들이 남쪽에서 살려면 공산당은 빨갱이라며 혐오해야 했다. 동네 사람의 고발 때문에 '나'의 가족은 공산 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조사를 받게 된다. 그들은 '나'를 벌레나 짐승 보듯 하며 조롱하고 위협하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나'에게 그때의 기억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밤마다 악몽을 꾸고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애써보지만 그들이 자신을 벌레로 기억하는데 본인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을 느껴서 기억을 지우는 것조차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새날은 밝고 앞으로 살 계획을 세워야 했다.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오는 것이 공산당이라는 의심을 피하는데 제일이지만 오빠 때문에 가지 못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벌레로 취급받던 지난날에 대한 작은 복수를 꿈꾼다. '나'는 공허하고 인기척 하나 없는 서울에서 버텨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 덕분에 현재 우리는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그때의 서울을 상상할 수 있다.  이렇게 소설로 남겨준 작가에게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