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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세로토닌 <미셸 우엘벡>

출처: yes24

 

::저자 소개::

 

1958년 프랑스의 레위니옹섬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님의 이혼으로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조부모와 보냈다. 국립 농업학교에서 농업경제학과 정보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 전산 관련직, 국회 전산부 행정 보좌직 등 다양한 일을 했다. 1985년 시인으로 데뷔했으며, 1996년부터는 전업 작가가 되었다. 1992년 첫 시집, <행복의 추구>로 트리스탕 차라상을 수상했다. 1994년 첫 장편소설 <투쟁 영역의 확장>을 시작으로 <소립자>, <플랫폼>, <어느 섬의 가능성>, <지도와 영토>, <복종>, <세로토닌> 등을 썼다. 그는 소설을 통해 자유 자본주의의 노동과 성, 인간의 이기주의, 프랑스 정치 문화나 이슬람 혐오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관해 본인만의 소신을 밝혔다. 

 

 

 

**A는 최근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튜브나 트위터를 하며 시간을 떼웠다. 시간은 잘 흘러갔지만 괜히 불안해졌다. 무언가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A는 얼마 전 서점에서 스치듯 보았던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가 생각났다. 다들 자기 계발을 하며 열심히 사는데 자신만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며 사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책이라도 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책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세로토닌」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과학이나 의학서적도 아닌 소설책인데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제목이다. 그녀는 우울증과 관련있다는 그 호르몬이 궁금해졌다. 지금 자기도 조금 우울했으니까. 작가는 프랑스인이다. 우라 나라에서 유명한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알았지 처음 들어본 사람이다.

 A는 소설 속 인물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남자 주인공은 아주 편협한 인간관계를 가졌음에도 지나간 옛사랑이 꽤나 많았다. 그와 함께한 여자들을 모두 기억하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프랑스인이라서 A가 평소에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었다. 어쨌든 이름은 대충 눈에 바르고 넘기기로 했다. 

 항우울제 캅토릭스를 먹는 주인공 플로랑 클로드는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정적이었다. 좋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도 비꼬면서 보는 듯했다. 그는 마흔여섯 살의 프랑스 백인 남성이고 농업대학을 나와 농산부에서 농업 기술자로 근무하다가 탁상 업무에 염증을 느끼고 사직을 했다. 그리고 이제 막 연인과 헤어지려 하고 있었다.

 

'호텔 측이 국제 관광 기준에 따라 뒤늦게 구색만 갖춘 형식적인 타협안'

'천연 그대로 방치된 자연이 키크고 멋진 나무들이 울창한 숲이나 대성당들에 비견되며 범신론적인 종교적 감동마저 자아내는 울창한 숲을 형성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등 플로랑 클로드는 주위에 어떤 사물을 보더라도 불평을 해댔다. 

A는 문득 '이건 그냥 자기 혼자 생각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프랑스 관광 사정을 알지 못하기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자연 그대로의 울창한 숲이  그의 눈에는 볼품이 없다고 느끼니 그의 마음 상태가 정말 심각하구나 싶었다.

플로랑 클로드의 삶은 지옥에 가까웠고 함께 사는 동거녀(유주)에 대한 애정도 거의 없었다. 유주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은 두렵고 그렇다고 계속 함께 하기도 싫은 그는 자발적 실종자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A는 소설 속 남자 주인공에게 도무지 몰입을 할 수 없었다. 남녀의 생각 차이일 수도 있고 문화의 차이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잠수 탄 다는 말을 거창하게 표현할 뿐이었다. 

 

나 또한 자발적 실종자가 되리라. 

 

 A는 별로 재미있지 않은 소설 도입부를 간신히 넘겼다.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그가 마지막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자신이 과거 사랑했던 여인들을 찾아볼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동거녀인 유주와 헤어질 채비를 했다. 그리고 가져갈만한 추억이 남긴 물건이라곤 맥북 에어가 전부라서 서글퍼졌다. 편지 한장, 사진 한 장 없이 가공된 알루미늄 상판의 얇은 평행 육면체. 고작 1100그램. 그것이 그에게 남겨진 전부였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디지털 혹은 필름 카메라는 더 이상 쓸모 없어졌고 우리는 삶의 대부분의 기록을 디지털화해서 남긴다. 맥북 에어나 아이폰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들어있으리라.  A는 그러한 생각에 미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내 A는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를 바라보며 마음의 씁쓸함을 달랬다.  

 


사랑을 일종의 둘이 꾸는 꿈에 비유하는 건 틀린 생각이 아닐 것이다.
사랑은 어쨌든 우리가 지상에 존재하는 시간들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어쩌면 세상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유일무이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고독 속에서 행복할 수 없다. A는 지금 이곳보다 7시간 늦은 시간을 살고 있는 그에게 최초로 연민을 느꼈다. 피부색이 하얗든지 아니든지, 나이가 많든지 적든지, 남자, 여자이건 간에 사람은 고독하면 불행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연인의 사랑을 갈구했다. 그것만이 그를 치유시켜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복용 중인 캅토릭스는 세로토닌을 분비시킬 수는 있지만 안타깝게도 성기능에 문제를 일으켜 사랑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최소한의 생활은 유지시켜 주지만 더 나아가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A는 그가 옛 연인들을 찾아가 다시 진정한 사랑을 찾기를 바랐다.    

 

학창 시절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시절이다.
미래가 활짝 열려있고,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유일한 시절.

 

그에게 학창 시절 이후로 펼쳐진 성인의 삶은 느리고 정체되어 있었다.  젊은 날의 우정, 학창 시절에 맺었던 진실한 우정은 성인의 삶의 문턱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좌절된 꿈의 산증인들인 젊은 날의 친구들과 재회를 피하게 됐다고 말한다.

  마흔여섯 살인 그에게도 행복했던 시절은 있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추억만 곱씹으면서 지내기엔 에너지가 모두 소진됐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에메릭을 찾아갔을 때, 학창 시절이 유일하게 잘 나가던 시절임을 깨닫게 된다.

소설을 읽던 A는 플로랑 클로드의 상황이 지금 자기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좌절된 꿈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어렸을 때 꿈꿨던 것의 절반쯤은 포기하고 살고 있고, 친구들과의 재회가 내 인생의 추락을 나타내는 산증인을 대면을 피하려는 의도보다는 사는 게 여의치 않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낸 뒤
의미를 최대로 부풀리고, 그렇게 메커니즘은 하릴없이 계속해서 돌아간다.  

 남의 불행에 섣불리 조언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조언을 듣는 입장에서도 싸구려 동정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의 메커니즘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하지만 A는 그 연결 고리를 끊어 줄 수 있는 것 또한 사랑의 힘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메릭에게 사랑하는 아내가 곁에 남아 있었다면 그가 자살을 하는 비극을 불러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 속에는 프랑스의 낙농업자의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우유 쿼터제의 폐지와 환경단체들의 압박 등으로 지역 낙농업자들의 삶은 힘들어져갔다. 에메릭은 농장 운영이 잘 되지 않자 돌파구를 찾아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부띠크 호텔을 운영하려고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고 그의 아내는 결국 그를 떠나갔다. 에메릭은 보드카에 중독되어 절망 속에 살다가 마지막으로 낙농업자들의 피해를 어필하기 위해 이웃들과 파리의 거리로 행진했다.

 A는 세계화나 반세계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누구든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면 거리로 뛰쳐나오는구나 싶었다. A가 어렸을 때만 해도 여기저기서 세계화가 좋은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지구촌 사람들은 하나이니 경계 없이 다 같이 잘 살아 보자고. 하지만 지금 많은 나라에서(특히 미국) 자국민을 살려야 한다며 보호무역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무엇이 옳은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세계화를 통해 전 세계의 자본 시장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된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런 변화 가운데 에메릭도 있었을 것이다. 선대부터 해오던 농장이지만 자본력이 큰 다국적 기업의 침투, GMO 등 새로운 기술의 도입 등은 그가 설 자리를 점점 좁게 만들었다.   

 

 살아 숨 쉰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 행복하다고 느끼고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삶이 이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로랑 클로드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삶은 끝나 있었다고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다. 그는 자신의 생은 정말이지 길지 않았다고 느낀다. 문득 돌아보니 인생이 끝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살을 계획하고 아파트에서 한 방 벽면에 자신만의 페이스북을 만든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삶에 의미 있었던 두 여인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카미유 사진 두장과 케이트 사진 한장. 삼천장이 조금 넘는 사진들 중에서 흥미로운 사진은 결국 자신이 진정성있게 사랑한 두 여인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사랑을 되찾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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