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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몬드 <손원평>

감정표현 불능증(Alexithymia) :: 1970년대에 정신분석가인 피터 시프너스(Peter Sifneos)가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신체화 장애의 기전을 연구하던 중에 도입된 개념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신체화 장애란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겪는 환자가 신체적 이상 없이 요통,두통 등 증상을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환자가 스스로 감정을 인식하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능력의 부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아동기에 정서 발달 단계를 잘 거치지 못하거나 트라우마를 겪은 경우, 혹은 선천적으로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경우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편도체의 크기가 작으면 감정 가운데에서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출처: 교보문고

 

 '아몬드' 라는 제목과 표지 한가득 그려진 무표정한 소년. 나는 서점 베스트셀러 칸을 오래 차지하고 있던 이 책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제목이 쉽기도 했고 표지가 인상적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 어떤 내용일지 상상해본다면 재밌을 텐데. 문득 책 제목을 보고 내용 알아맞히기 게임을 하면 흥미진진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 제목인 '아몬드'는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소년이 자신의 뇌의 일부분인 편도체를 아몬드 모양에 빗대서 표현한 것이다. 일단 나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표지 속 소년의 모습과 아몬드를 연결시키지 못했다. 그냥 우울한 청소년 한 명이 등장하나 보다 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다음에 어떤 내용이 이어질까 상상했다.

  편부모 가정에서 자신의 감정의 이름을 모르고 자라는 소년이 친구 혹은 선생님을 만나서 공감하는 법을 배워나가지 않을까? 그 친구(선생님)가 어떤 애 일지는 내가 알지 못하겠지만.

 

::줄거리 및 감상::

 

"할멈, 사람들이 왜 나보고 이상하대?"
"네가 특별해서 그러나 보다. 
사람들은 원래 남과 다른걸 베기지 못하거든.
에이그, 우리 예쁜 괴물." p21

 주인공인 윤재는 보통 사람들이 갖는 감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특히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 어려워 냉정하다거나 인정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엄마와 할머니는 감정의 어휘들을 글로 써서 집안 곳곳에 붙여두고 상황에 따라 반응하는 방법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와 엄마를 잃게 된다.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한 남자에 의해 묻지 마 폭행을 당하게 된 것이다. 윤재는 이제 가족 없이 혼자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항상 울타리가 되어주던 가족이 사라지자 그는 인간관계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결국 학교에서 왕따가 된다. 그리고 곤이와 도라를 만난다.

 

곤이가 먼 곳을 봤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러니까 너랑 나도 언젠가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럴 거야. 어떤 방향이든. 그게 인생이니까"
  

 우연히 윤재는 곤이를 대신해서 아들인척 그의 엄마의 임종을 지키게 되었다. 이후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곤이가 전학을 오면서 한 반이 된다. 학교에서 그는 자신인 척 엄마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윤재를 괴롭혔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뺏긴 것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곤이는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먼저 상처를 주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감정 표현이 지나쳤고 화도 자주 냈다. 오랜만에 만난 아빠에게도 일부러 못되게 굴고 말썽을 일으켰다.

 윤재를 향한 곤이의 괴롭힘은 그의 아버지와 선생님들의 수습으로 정리되었다. 곤이는 윤재를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고 대신 친해지기로 결심한 듯 보였다. 엄마와 할머니 없이 윤재가 혼자 운영하는 헌책방을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곤이는 그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책을 핑계 삼아 오래도록 대화를 나눴다.

 윤재는 곤이가 겉으로 센척해도 많이 외롭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곤이는 지금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어 했지만 완전히 달라지고 싶기도 했다. 윤재는 그의 마음에 점점 공감을 하면서 성장을 하게 된다.

 

"어땠어? 그 여자."
질문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넌 만나 봤잖아. 한 번뿐이지만.
마지막엔. 마지막에는 뭐라고 했냐."
"마지막엔 날 안아 주셨어. 꽉."
"따뜻했냐, 그 품이."
"응. 많이."
솟아올라 굳어 있던 곤이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그 애의 얼굴이
쭈글쭈글해졌다.


 여름 방학 내내 둘은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 닮을 수는 없겠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감정이 부족한 윤재와 감수성이 풍부한 곤이를 보며, 우리들의 마음도 저 둘 사이 어디쯤에 있다가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평범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어느 날은 화산처럼 폭발하는 감정이 솟구쳤다가 어떤 날은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가라앉았다가 하는 감정들을 겪으며 스스로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되는 것이다.

 

곤이가 저지른 골치 아픈 짓들도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역시 곤이가 태어나지 않는 편이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 애가 아무런 고통도 상실도 느낄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은 의미를 잃는다. 목적만 남는다. 앙상하게. p225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일은 매우 어렵다. 특히 일이 뜻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때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어려운 일을 겪고 나면 우리는 한차례 성숙하고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을 얻는다. 고통과 시련은 삶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준다. 

 

톡. 내 얼굴 위에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뜨겁다. 델만큼. 그 순간 가슴 한가운데서 뭔가가 탁, 하고 터졌다. 이상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아니, 밀려드는 게 아니라 밀려나갔다. 몸속 어딘가에 존재하던 둑이 터졌다. 울컥. 내 안의 무언가가 영원히 부서졌다. p248

 

드디어 윤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 그에게 느껴졌던 희미한 감정들은 무너진 댐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가득 흘러넘쳤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이제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두려움,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도 모두 흠뻑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 미래에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둘의 대화처럼, 그들의 모습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했기에 나는 그들과 함께 기뻐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도라가 서 있다. 
갑자기, 바람이 목적지를 바꾸었다. 
도라의 머리칼이 천천히 방향을 바꿔 반대쪽으로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 애의 냄새를 실은 바람이
내 코안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무거운 돌덩이가 하나 내려앉았다.

윤재는 여름 방학이 지나고 새로운 친구 도라를 사귀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곤이와 다른 의미로 윤재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켰다. 그녀를 생각하면 관자놀이가 지끈 거리기도 하고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녀를 계속 만나고 싶었다. 도라를 통해 윤재는 사랑과 설렘이라는 감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 「아몬드」 속 윤재의 이야기는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우리 모두 그와 비슷한 면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일과 크게 관련이 없으면 쉽게 외면해버리고 공감하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본인의 작은 일에는 호들갑을 떨면서도 정작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할 때가 많다. 나도 그런 모습을 삶 속에서 발견하고 반성하게 되었다. 친구를 이해하고 곤이를 구하기 위해 용감하게 나서는 윤재를 보며 나 역시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